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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준 두남엔지니어링(주) 승강기 설치소장

승강기 본 적도 타 본 적도 없는 탈북청년, 승강기 설치소장이 되다!

박경준 두남엔지니어링(주) 승강기 설치소장

 

박경준 소장은 현장 3년차 신참이다.
사실 박 소장은 32년 동안 승강기를 타보기는 커녕 본적도 없는 탈북자.
그는 어떻게 승강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올 6월 결혼을 앞두고 요즘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박경준 소장을 만나본다.

■ 글 / 편집부

 

 

탄광 생활 벗어나려 어머니와 탈북


 

  승강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던 그가 승강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1년 한국으로 오면서부터다. 3년 전 박소장은 어머니와 탈북했다. 중국 접경인 양강도 혜산에 태어나 전문대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군에서 복역했다. 기다리던 제대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은 탄광에서의 강제 노동. 미로 같은 갱도를 오가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들 걱정에 맘 졸이실 홀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눈물에 결국 자유의 땅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어요. 남한 사람들과 경쟁해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일반 중소기업 사무직보다는 기왕이면 기술을 배워서 안정인 것이 좋겠다 싶었죠.”

 

 

우연히 마주한 승강기 전문인력 양성과정 안내

 

  남한에서 첫 직장으로 통신사 입사해 인터넷 전화를 설치했다. 가가호호 고객들을 접하는 서비스 직종이다 보니 말씨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혔다.


  “제 북한 말씨를 듣고 나서는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곤 했어요. 저한테는 상당한 스트레스였죠. 그래서 표준말을 쓰고 억양을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결국 그만뒀어요.”


  이게 아니다 싶어 사표는 냈지만 당장 생활고가 그를 더 조여왔다. 일자리를 찾으려고 도움이 될만한 곳은 여기저기 뛰어 다녔다. 그러던 중 여의도 북한이탈주민재단에서 우연히 승강기 전문인력 양성과정에 대해 안내 받았다.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바로 등록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꿈이란 것을 가슴에 품었어요. 북한에서는 꿈은 상위 10%의 사람들의 것이에요. ‘승강기 설치 기술을 배워서 전문 엔지니어가 되자‘고 결심했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니 절로 앞만 보고 달리게 됐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행복한 꿈도 함께 꾸게 됐어요”


  30년 만에 처음 만난 승강기는 그렇게 그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탈북자 출신 유일한 설치소장


  현재 수도권 지역에서 탈북자 출신 설치 소장은 박 소장이 유일하다. 처음에 8명의 탈북자들이 박 소장과 함께 한국승강기대학에서 이론 교육을 받았지만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에서 현장실습을 받는 동안 모두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기술을 배운다는 게 참 어려워요. 특히 기술 용어의 90% 이상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를 배운 적 없는 탈북자들에게 더 난관이죠.”

 

  그 역시 힘들었다. 그만 둘까 수백 번을 생각했다. 주 7일을 꼬박 일할 때가 많지만 근무시간이나 열악한 환경에 비해 월급이 작다. 일을 할수록 돈이 모여야 하는데 오히려 마이너스. 


  “돈은 안 모이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한 번은 사장님 책상에 사표를 몰래 두고 도망갔어요. 이때 지금의 사장님이 저를 설득하고 다시 받아 주셨어요. ‘힘든 것 잘 안다, 조금만 참자. 내가 도와주겠다’ 하셨죠.”

 

  그냥 새로운 사람 뽑아서 쓰면 됐다. 아직 기술도 없고 경력도 없는 그를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모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사장님의 짧은 몇 마디에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결 같이 박소장을 믿어주고 힘이 되어주신다.

 

 

힘들 때면 북한에서 살던 때를 떠올려


  거칠고 외로운 설치현장, 365일 매일을 집보다 더 오래 지내는 곳. 탈북자라고 현장에서 무시당한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현장의 선배님들과 동료들은 ‘한국 사람들도 힘든데 대단하다‘고 격려해준다고. 


  “현장의 선배님들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전화하면 언제나 성심껏 대답해주세요. 부족한 저를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에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


  매번 선배들에게 묻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일과 후에는 시간을 내서 관련문서도 찾아보고 꼼꼼히 공부한다. 잠은 하루 4시간 정도로 줄였다. 힘들 때 마다 북한에서 살던 때를 떠올린다. 그곳에서는 이보다 백 배는 힘든 일도 버텨냈다. 의지가 흐트러질 때면 ‘이것 못해낼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끝으로 박 소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신참내기 소장이에요.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해야죠. 능력을 키우고 준비를 철저히 해서 설치업체를 경영하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명절 전야에 텔레비전을 보면 고향이 참 그리워지곤 하는데, 통일이 되면 내가 직접 북한땅에 승강기를 설치하는 것이 목표예요.”


  그는 같이 있는 시간이 적고 제대로 된 신혼여행 갈 시간도 없지만 이 일을 이해해주는 착한 여자, 동갑내기 신부와 올 6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현실은 고되고 힘들지만 늘 꿈을 꾸며 그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박경준 소장.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인 듯 하다.

 

 

북한의 승강기 풍경

 

  • 승강기의 95%가 평양에 있고 그 중에서도 중앙당 건물, 상위 1%들만 이용한다고 보면 된다.
  • 일반인 아파트에는 승강로는 있지만 설치되어 있지 않다.
  • 승강기 운전원이 존재하고 엘리베이터 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 카 안에서 층수를 조작해 준다.
  • 에스컬레이터는 지하철 몇 곳에 존재하고 출퇴근 시간 동안 운행한다.
  • 군복 입은 경비대가 입구에서 지키고 있다.
  •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은 한국과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