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안원 공창석 원장 특별 기고
‘근초고왕 해양왕국 백제를 세우다’ 2편
요서(遼西) 식민지 경영
근초고왕에 관한 한·중·일 사서의 기록을 비교하면 누락된 19년간의 행적과 ‘원대한 식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표 1>은 근초고왕에 관한 한·중·일 사서의 기록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먼저 근초고왕이 천지신명에게 올린 제사가 예사롭지 않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국왕이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사서에 수록된 사례는 흔치 않다. 그러므로 사서에 수록된 제사는 일반의 의례적인 제사가 아니고, 필시 무슨 곡절이 있거나 후대를 위해 기록해 두어야할만한 각별한 사연이 있다고 보는 게 순리다. 그렇다면 원대한 식견을 가진 근초고왕이 무슨 곡절과 사연이 있기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고, 김부식은 이를 특별한 의례로 보아 『삼국사기』에 분명히 기록해 둔 것이다.
이 제사의 곡절과 사연을 푸는 열쇠는 이외로 중국의 『송서』와 『양서』로부터 찾을 수 있다. 『송서』와 『양서』에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2군을 정벌하여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백제가 요서에 식민지를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언제 요서를 차지하고 언제까지 지배했는지는 언급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누가 이 대담한 정벌을 언제 시도했을까? 김부식이 누락시킨 근초고왕 연대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에 앞서 먼저 요서 진평군의 지명을 고찰해보자. 진평군의 위치는 산해관이 있는 진황도(秦皇島) 부근이다. 그곳은 옛 고조선의 근거지로서 토착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일찍 선사시대부터 갈석산을 끼고 육상
교역로가 발달한 지역이다. 그리고 서해에서 북상하는 해류가 이곳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요서 지역은 동아시아 교역의 패권을 쥐고 싶은 백제로서는 군침 나는 곳이고, 또 빼앗아 차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건너 공격하여 뺏기가 용이한 곳이다.
다음은 백제가 요서를 정벌한 시기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송서』와 『양서』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뒤’라고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요동정벌은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315년에 현도성은 함락시킴으로서 일단락된다.4) 그러면 이 때라고 보아야 하나? 아니다. 이 때라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
면 요동은 337년에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황(慕容)으로 인해 전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모용황은 중원을 집어삼키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원을 공략하기에 앞서 배후의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342년에 친히 정병 4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丸都城)을 공략하여 허물고 포로 5만 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때 모용황은 고구려의 신속을 바라며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미천왕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갔다. 고구려로서는 치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듬해 343년에 모용황에 칭신하고 미천왕의 시체를 돌려받았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뒤’의 시기는 343년 이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4세기의 중국은 이른바 5호16국 시대였고, 요서지역은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에 속해 있었다. 전연은 고구려를 제압하여 배후를 안돈시키자, 350년 후조(後趙)의 북경을 함락하고 도읍을 용성(龍城)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뒤이어 351년에는 후조를 멸망시키고 후조의 도읍인 업( ,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352년에 스스로 황제국임을 선포한다. 이와 같은 전연의 움직임을 백제의 요서공략과 연계지어 보면 전연이 도읍을 북경으로 옮긴 350년까지는 요서공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연의 수도 용성이 요서 일원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요서 진평군을 차지한 때는 아마도 전연이 본거지를 북경을 거쳐 화북의 업( )으로 두 번이나 천도하는 시기 동안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요서는 전연의 주력이 떠난 뒤여서 비어 있는 것과 다름없었고, 고구려는 패전의 상흔을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아직 고국원왕의 생모가 전연에 볼모로 잡혀있는 처지여서 어쩌지를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한편 전연은 중원을 공략하며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치달아서 국지적인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또한 업에 천도한 뒤 스스로 칭제하고 천자국으로서의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총력을 기우려 산동지역 공략에 몰입하고 있었다. 전연은 356년에 산동지역을 평정한다. 따라서 전연이 산동을 차지한 356년 이후부터는 전연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체제가 안정되어서 사실상 요서공략은 어려워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제가 요서 진평군을 차지한 시기는 근초고왕이 재위한 351년부터 356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김부식이 역사에서 누락한 근초고왕의 연대기 중에 분명한 것은 이 시기 근초고왕은 중국 요서지역을 공략하고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모화사상에 물든 김부식에게 아마도 ‘불편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연은 백제가 요서를 차지한데 대해 가만히 구경만 하였을까? 그렇지는 않고 백제가 잘 버티어 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서 진평군이 중원과 요동을 잇는 주요 통로지만, 북경에서 요동으로 가는 직통 초원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전연으로서는 굳이 힘들여 빼앗을 필요가 적었다. 또 전연은 해상무역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어서 그 곳의 가치를 낮게 보았을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또한 과도한 영토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해상무역에만 치중함으로서 전연이 즉각적이고 강력한 대응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떻던 백제 근초고왕이 요서 진평군을 공략하여 해양무역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경영한 것은 확실하다.5)
신라, 백제의 왜국 선물 바꿔치기 들통나 망신
근초고왕의 360년대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자. 근초고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신라’, ‘백제와 고구려’, ‘백제와 왜(일본)’에 대한 기록을 <표 1>과 같이 도출하여 분석하면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먼저 <표 1>을 보면 근초고왕은 366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열고, 뒤이어 368년에 ‘좋은 말 2필’을 선물한다. 신라와의 교빙(交聘)은 이 정도 에서 끝이다. 하지만 왜 신라에 말을 선물했을까? 혹시 말 선물이 따로 암시하고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다음 근초고왕은 왜국과의 통교를 위해 366년 탁순국(卓淳國)에게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탁순국의 도움을 받아 왜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는다.6)
367년에 백제·신라·왜국 사이에 흥미로운 외교사건이 발생했다. 웬 뚱딴지 같은 사건으로서, 신라가 왜국에 보내는 백제 선물을 신라의 것과 바꿔치기 했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7) 그 경위는 대략 이렇다. 근초고왕이 세 명의 사신 구저(久),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를 왜국으로 파견했다. 사신들은 왜국에 줄 선물을 가지고 탁순국으로 떠났다. 이들은 일단 육로로 탁순국에 가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지금의 양산지역에서 신라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신라에 3개월간 붙잡혀 있다가 신라 사신과 함께 왜국에 갔다. 이때 신라 사신이 왜국에 보내는 백제 선물을 신라 선물과 바꿔치기 하여 왜국에 주었다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당연히 말썽이 생겨 진위가 가려졌고 신라 사신은 망신을 당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선물은 진귀한 명품이고 수량이 많은데 비해 신라 것은 물품도 하찮고 수량도 적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백제가 신라에 준 말과 백제가 왜국에 보낸 진귀한 명품이 백제 토산물인가? 아니면 물 건너 중국에서 온 외래품인가? 하는 의문이다. 먼저 말은 근초고왕이 중국 요서에서 구해온 북방의 명마로서, 백제는 중국 요서를 정벌하여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으며, 이런 북방의 명마를 요서에서 바로 구해온다
고 은근히 뽐내면서 신라에 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백제가 왜국에도 말 2필을 선물한 것을 비춰 봐도 틀림없을 것 같다.9)
또 백제가 왜국에 보낸 진귀한 명품은 백제에서 생산되지 않고 대외교역으로 구할 수 있는 위세장식품을 비롯한 사치품일 것이다. 이 또한 백제가 요서에서 구해온 명품이었을 확률이 높다. 만약 백제 토산물이라면 대충 그 품목과 품질이 드러나 있을 터이므로, 신라가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바꿔치기를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초고왕의 원대한 식견으로 백제 이미지 완성
이상을 종합해보면 백제가 366년 이래 자신감을 가지고 신라와 일본에 교역을 매개로 한 외교공세를 펼친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자신감은 근초고왕이 요서를 차지한 뒤, 요서로부터 중국의 명품을 직접 반입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백제 사신의 행로를 주의 깊게 통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백제의 사신들이 일단 탁순국으로 가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백제 사신들이 탁순국으로 갈 때 해로가 아닌 육로로 갔다. 이것은 당시까지 백제가 남해 연안을 장악하지 못해 백제의 배가 남해연안을 거쳐 왜국으로 직항할 수 없었다는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니까 당시에 백제와 왜국은 왕래가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상호 왕래조차 자유롭지 않던 두 나라는 일단 통교하자마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또 백제가 남해연안을 정벌할 때에 왜국이 군사를 보내 지원할 정도로10) 돈독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졌다.
백제와 왜국이 친밀하게 된 것은 근초고왕이 요서에서 가져온 진귀한 중국산 명품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가 요서의 식민지 경영을 왜국에 소개하고 그 증거로서 명품을 선물하며, 앞으로 백제의 대중국 교역에 왜국이 가담하기를 요구했고, 왜국이 이를 믿고 받아들인 것이다.11) 그리하여 포상팔국의 전쟁 이후 신라가 주도해 온 왜국과의 교역권이 백제로 넘어갔다. 그동안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왜국과의 교역을 주도하던 신라는 근초고왕의 등장으로 인해 위축되어 갔고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었다.12)
근초고왕은 왜국과의 통교가 성사되자, 동남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의작은 소국들을 정벌해 나가면서 가야연맹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13) 또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을 정벌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멸망시키고 전남 해안지역을 전부 차지했다. 이로서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부터 남해 연안까지 해양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일본과의 교역도 신라를 재치고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한편 이때에 비로소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한반도’,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해양교역 네트워크가 온전한 모습으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동아시아 해양교역은 백제가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갔고, 이로부터 백제의 상인들은 야심차게 중국과 일본, 그리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결과적으로 근초고왕의 ‘원대한 식견’이 발휘되어 동아시아의 해양교역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아울러 진취적이며 화려하고 개방적인 무역왕국 백제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송서』 권97, <백제열전>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2) 『양서』 권54, <백제열전>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3) 당나라의 재상(宰相) 두우(杜佑: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에도 백제가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
과 유성(柳城, 지금의 요령성 조양(朝陽)) 사이에 위치한 요서와 진평 2개 군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4년,16년 조.
5) 정진술, 『한국 해양사』, 경인문화사, 2009, pp.166-171.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로 장보고의 해상활동이 세상에 알려졌듯이, 사료 부족으로 백제의 요서경략을 부정함을 경계한다.
6)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6년 3월조 김현구 외 공저, 『일본서기 한국관계 기사 연구(1)』, 일지사, 2002, pp.89-93.
7)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7년 조
8)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7년 조
9) 『고사기』 「응진천왕」 ‘백제의 조공’ (太安萬呂 지음, 권오엽·권정 옮김, 『고사기』 중, 고즈윈, 2007, 382쪽)
10)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9년 조.
11) 우재병, 「4-5세기 왜에서 가야·백제로의 교역루트와 고대항로」, 『호서고고학』 제6.7집, 호서고고학회, 2002, pp.189-195. 왜 측의 한반도 교역루트 다원화 노력의 결실로 설명한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무역품은 철이었고, 철의 수출 입장에서 가야·백제의 일본 진출이 먼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 윤재운,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p.40
13)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 63집, 일지사, 1991, pp.83-87. 백제의 가야
정벌시 백제와 왜의 중계역할을 담당하고, 왜군을 인솔한 자는 목라근자(木羅斤資)다. 그는 왜에서는 백제장군으로, 백제에서는 왜국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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