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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갑니다, 문이 닫힙니다” 성우 정부용

 

“올라갑니다, 문이 닫힙니다”

승강기 안내 메시지의 주인공 성우 정부용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면 벨보이나 안내양 대신 스피커 속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그 주인공은 누굴까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엘에스터가 직접 찾아 나섰다. 그 친숙한 목소리 주인공은 바로 성우 정부용 씨다.   글 편집부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 누구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승강기는 그리 친숙한 시설물이 아니었다. 백화점이나 호텔, 병원 등 주요 시설물의 엘리베이터에는 안내양이 존재했고 버튼을 눌러주고 문을 열어주는 등 승객의 안전한 승강기 이용을 도왔다. 그러다 점차 승강기 이용에 익숙해지고 안전 이용 문화가 자리를 잡으며 안내양도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게 적막해진 엘리베이터에서 다시금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에 승강기를 타며 어리둥절 하던 때를 기억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따라해 보기도 하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굴까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베일에 싸여 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40여 년의 베테랑 성우, 정부용 씨다.


“엘리베이터 음성 안내 녹음을 한 지도 벌써 30여 년은 된 것 같네요. 당시 저는 기업 광고를 전문으로 녹음하던 성우였는데 승강기 안내음성을 녹음한다고 하길래 의아했어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명확하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가 필요했던 거죠.”

 

 

 

정확한 발음에 애먹었던 성우 초기 시절

1973년 MBC CM 성우로 입사한 그는 맑고 선명한 목소리로 단 번에 사람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기업들은 신제품이 나오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알리길 원했다. 40, 50대라면 기억하는 롯데음료의 ‘쌕쌕 오렌지’ 광고, “주스는 마시고 알맹이는 터트리고~”, “쥬시 후레쉬, 후레쉬 민트, 스피아 민트, 껌은 역시 롯데껌”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국민 CF의 목소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정부용 씨다.

 

“성우 활동 초기에는 발음이 정확하질 않았어요. CM은 단 몇 초 안에 주목성 있게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상품의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데 CM 성우로서 발음 때문에 애를 먹었죠. 처음 MBC에 입사했을 때 이따금 발음이 분명치 않아서 꼴찌 성우였죠. 성우를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성우실에서 혼자 발음을 연구하며 AFKN을 히어링하고 틈나는대로 영어공부를 하여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하게 된 것입니다. 문이 닫힐 때가 있으면 열릴 때도 있더라고요. 여러분도 힘들 때 용기를 내어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세요. 파이팅!”

 

 

 

 

 

지금의 30, 40대는 모두 나의 제자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모두 그의 목소리로 녹음된 국어, 음악 교재로 수업을 했다. 당시 정부는 표준 우리말 교육을 위해 각도 방언을 쓰는 현직 교사들을 대신할 수 있는 녹음 교재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는 4분의 4박자로~” 그가 바로 정부용 씨다.

 

 

“지금의 30~40대는 대부분 저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국어나 음악 시간에 그리고 영어교재로 아마 제가 녹음한 음성 교재를 듣고 공부했을 거예요. 그렇게 정부 기관이나 공공 시설물에 덧입혀지는 음성 녹음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제 이름이 ‘정부용’이라 그런가요?”(웃음)

 

 

웃으면서 전한 이야기지만 그는 사실 어릴 적 한글을 깨치면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물건들이 ‘개인용’과 구분되어 공공의 것으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커서 그런 일을 해야겠다’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정부용 목소리 없인 대한민국 꼼짝 마라!

 

 

엘리베이터 안내음을 녹음하던 당시 정부용 씨의 모습.

그는 그 동안 800여 편의 광고를 녹음하였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거리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녔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신의 목소리,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이 에스컬레이터는 위험하오니 뛰거나 장난치거나 측면에 기대지 마십시오’, 전화를 걸어도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안내 방송, 공항·항만의 관제시스템 안내 음성도 담당하여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모든 비행기는 그의 음성을 듣고 착륙한다. 한 마디로 그의 목소리 없이는 ‘대한민국 꼼짝 마라!’일 정도.

 

“지하철에서 전화를 받게 되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여보세요, 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이거 얼마예요?’ 몇 마디를 하면 사람들이 쳐다봤어요.


처음에는 뭐가 잘못됐나 생각했는데 제 목소리가 귀에 익었나 보더라고요. 목소리는 귀에 익는데 잘 모르는 얼굴이니 ‘이상하다~’ 생각했겠죠.”

 

 

 

내면을 가꿔야 하는 아름다운 목소리

요즘 얼굴이야 화장과 의술의 힘을 빌어 예뻐질 수 있다지만 음성은 성형이 불가하니 예쁜 목소리는 타고나야 하지 않을까. 그는 목소리도 가꾸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릴 적부터 목소리가 예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워낙 특별한 음성을 소유하긴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가 더 부드럽고 편안한 음성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다. 목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남의 것이 된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듣는 이를 배려하는 목소리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종교활동과 봉사에 힘쓰며 마음에 여유를 가지다 보니 목소리도 자연히 더 편안해졌다.


“목소리가 아무리 예뻐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가시 돋치거나 부정적인 말이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죠. 나이 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하잖아요. 목소리도 마찬가지예요. 평소 거칠게 얘기하고 고함을 치거나 화를 많이 내면 목소리도 변하게 되죠. 결국 목소리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 배려한 엘리베이터 안내음

엘리베이터 안내 음성 녹음 또한 그는 단순히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심히 듣게 되는 그 목소리에는 ‘환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힘내세요’ 등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서 ‘올라갑니다’ ‘1층입니다’의 음성을 구사한 것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나 부담 없고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되길 원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떤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탈 지 모르는 공간이잖아요. 시험에 합격해 기쁜 마음인 사람, 사랑에 빠져 들뜬 사람, 실현 당한 사람, 누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가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가 너무 밝아도 안 되고, 너무 쳐져도 안 되죠. 그런 다양한 상황에서도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목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점을 염두에 두며 녹음했어요.”

 

 

매번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듣는 음성이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
로 그의 이런 철학, 배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던 것.

 

 

 

 

목소리의 영향력 알기에 시작한 보이스 클리닉

26년 전부터 그는 분당 갈보리교회 녹음봉사회를 통해 시각장애인을 위해 녹음봉사를 해왔다. 자택에 녹음시설을 갖추고 틈나는대로 녹음을 했는데 요즘은 녹음봉사를 자주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한국보이스클리닉을 조직하여 강의 활동도 하고 있으며 발음이나 음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목회자들과 신학대학원 강의도 나간다.

 

“입에서 쉽게 나오는 목소리라 그런지 사람들은 목소리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몇 초 동안에 모든 걸 표현해야 하는 광고 녹음을 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잘 알게 됐지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을 할 때 녹음 당시의 제 기분을 목소리만으로도 알아채는 그분들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사랑의 음성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이런 점들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 이렇게 보이스클리닉 강의도 가능한 것 같네요.”


잠자고 있는 전문 방송인들과 후배 성우들 중에서 자원하는 자들을 양성하여 전국 초·중·고·대학교에 보이스클리닉 강의를 하도록 추진하고 싶지만 수입이 많고 인기 좋은 방송을 마다하고 이 일을 함께 할 이를 찾는 것은 한계가 있어 아쉽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말의 중요성을 인지시키고 이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킬 수 있는 교육 과정과 지도자 양성이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훗날 이러한 강의가 대학 ‘보이스클리닉’ 학과를 통해 정식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하고 있다. 기존 성우와 아나운서 등 교육 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는 얼마든지 있다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그 역시 반갑다. 하지만 요즘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가 더 이상 엘리베이터 안내방송 녹음을 하지 못하게 돼 아쉽다. 짧은 한 마디일지라도 사랑과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안내방송 녹음에 임했다는 성우 정부용 씨. 목소리에 담긴 그 진정성 때문일까? 어느덧 엘리베이터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더 반갑고 정겹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