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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로 알아보는 '절도죄'의 성립

 

 

사례로 알아보는 '절도죄'의 성립

 

 

 

보통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절도라고 하며 형법에서는 절도죄를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범죄’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중 어떤 경우는 절도죄에 해당에 되고 또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판결이 내려져 알쏭달쏭한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몇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살펴보자.
글 이은수(법무법인 ‘지우’ 변호사)

 

 

사례1 / A는 회사를 퇴사하면서 회사 기밀에 해당하는 프로그램 파일을 USB에 저장해서 가지고 나왔다.

 

절도의 대상물은 <재물>이어야 한다. 여기서의 재물은 형태가 있는 유체물(有體物), 그리고 전기와 같은 관리할 수 있는 동력을 말한다. 전기는 무형물이지만 법률적으로 재물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웃집 전기를 몰래 사용했다면 절도죄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런데 컴퓨터 파일은 유체물도 아니고 관리할 수 있는 동력도 아니므로 절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결국 A를 절도죄로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A는 파일의 성질에 따라 ‘저작권법’ 또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을 이유로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고,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질 수 있다.

 

 

사례2 / B는 택시를 탔다가 우연히 앞서 탔던 손님이 놓고 내린 지갑을 발견했다. B는 기사에게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그대로 지갑을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절도죄는 재물에 대한 타인의 <점유>를 침해함으로써 성립한다. 점유란 내가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잃어버린 물건의 경우에는 물건 주인의 지배를 벗어났으니 점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물건을 잃어버린 곳이 택시, 당구장, 카페와 같이 타인의 관리 아래 있는 곳이라면 그 관리자의 점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B는 택시의 관리자인 택시기사의 점유 아래 있는 지갑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절도죄로 처벌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운 경우는 어떤가? 이 지갑은 소유자의 지배 아래 있지도 않고 관리자도 없으니 절도죄는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이때는 절도죄 대신 점유이탈물횡령죄(형법 제360조)가 적용된다(다소 넓어서 유실물의 관리자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지하철, 버스 내에서 지갑을 주운 경우도 마찬가지로 점유이탈물횡령죄가 적용된다.

 

 

사례3 / C는 어떤 가게에 들어갔다가 가게 주인 소유의 휴대전화를 허락 없이 가지고 나와 함부로 통화를 하고 1시간 뒤 주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게 입구 옆 화분에 놓고 사라졌다.

 

절도죄가 성립하려면 <불법영득의 의사>도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과 같이 이용하거나 처분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의 펜을 잠시 쓰고 돌려주는 경우처럼, ‘잠깐 빌려 쓰는 경우’에도 불법영득 의사가 인정될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시 사용의 목적으로 절취한 경우에도 그 사용으로 인하여 물건 자체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가 상당한 정도로 소모되거나, 상당한 시간 동안 점유하고 있거나, 본래의 장소와 다른 곳에 유기하는 경우에는 불법영득 의사가 인정될 수 있다. C의 경우,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고 하여 휴대전화의 경제적 가치가 소모됐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1시간 동안이나 가지고 있었고, 사용 후에도 화단에 휴대전화를 유기했기 때문에 절도죄로 처벌이 가능하다. 물론 통화료 등 무단사용으로 인한 민사적 책임은 별개의 문제다.

 

 

사례4 / D는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난 다음 아내의 지갑에서 몰래 직불카드를 가지고 나와 현금인출기에서 500만원을 인출한 뒤 곧바로 직불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D가 ‘500만원’을 절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 법원은 유사한 사례에서 절도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절도의 피해자를 아내가 아닌 ‘현금인출기의 관리자’라고 본 것이다. 법원은 ‘절취한 현금카드를 사용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해 취득하는 행위는 현금인출기 관리자의 의사에 반해 돈을 자기 지배하에 옮겨놓는 것이 돼 절도죄가 성립하고, 여기서 피해자는 현금인출금기 관리자가 된다’고 판단했다. 상식적으로 위 절도행위의 피해자가 D의 아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일단 D의 아내는 (계좌에 전산의 형태로 500만원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500만원이라는 ‘재물’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았고, 설령아내를 절도의 피해자로 보더라도 이른바 ‘친족상도례’에 따라 현행법상 D의 행위는 처벌될 수 없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법원도 이러한 점을 고려해 현금입출금기 관리자에 대한 절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D가 아내의 ‘직불카드’를 절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앞서 C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D가 아내의 직불카드를 사용하여 돈을 출금했다고 하더라도 직불카드 자체의 기능이나 경제적 가치에는 아무 변화가 없기 때문에 불법영득의 의사가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친족상도례란?

가족간의 일정한 범죄에 한해서는 형을 면제해주는 제도. 이에 따라 직계혈족·배우자·동거친족·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 사이에서는 절도죄, 사기죄, 공갈죄, 횡령죄, 배임죄, 권리행사방해죄와 같은 재산범죄의 형을 면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