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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김지헌 作

 

 

 

 

들이 천개의 눈으로 무대를 밝힌다
지휘봉을 잡은 것은
연두빛 연미복의 유리산누에나방

 


서주부는 생강나무와 히어리의 이중주다
1악장이 시작되자
네발나비가 건반위를 알레그로 템포로
경쾌하게 날아 다닌다
맨 앞줄의 진달래가 신들린 듯 바이올린을 켜자
멋진 아리아를 부르는건 되지빠귀 가족들
저음의 더블베이스를 맡은 백목련은
깜빡 조느라 그만 순서를 놓쳐 버렸다
꽃의 중심에 빨대를 꽂은 꿀벌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고
곧 때죽나무가 은종소리를 내며
트라이앵글을 울릴 것이다


2악장은 아다지오
대지의 자궁이 열리듯 태양의 그림자 속으로
자벌레 한 마리 느릿느릿 기어 든다
그 뒤를 민달팽이가 오체투지로 나아가고
무당거미 한 마리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고 있다


알레그레토로 이어지는 3악장
무논의 개구리들이 일제히 합창곡을 연주하는 봄밤
한알의 도토리가 숲을 이루기까지
아득한 시간 저편에서
쉬지 않고 윤회의 바퀴를 돌리는 어느 큰 손이 있어
음악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인 김지헌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배롱나무 사원> 외